2022년 11월 24일 목요일 대체로 맑으나 미세먼지 많은 날.
수원에서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나이들어 백수가된 지금 큰맘먹고
오늘 드디어 화성 답사에 나섰다.
오늘도 대중교통인 열차를 이용한다.
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행궁내부 배치도
화성행궁 앞에는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세그루가 서있다.
이 느티나무는 궁궐의 조성제도에 의해 品자 형태로 심어진 것이다.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이 나무 아래에서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올바른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풍루(新豊樓)
건물규모 및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목조 2층 와가
일제강점기 훼손되었던 것을 화성행궁 복원 사업으로 다시 지음(2002)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처음에는 진남루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서
따온 이름으로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다.
좌익문.
신풍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좌익문.
중양문.
좌익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중양문이 보인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수당 내부모습.
득중정(得中亭)
건축시기 : 정조 18년(1794), 2002년 복원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제후가 될 수 있고,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 혜경궁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낙남헌(洛南軒)
건축시대 : 정조 18년(1794)
경기도 기념물 65호(95.4.24)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의 남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노래당(老來堂)
건축시기 : 정조 18년(1794)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득중정(得中亭)
건축시기 : 정조 18년(1794), 2002년 복원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행궁 후원의 단풍
후원 (팔달산)에서 보는 행궁.
단풍철이 한참 지나고 있는데 행궁 후원에는 아직도 가을이 머물고 있다.
수원 화성행궁 후원의 단풍.
행궁후원.
행궁후원.
내포사.
내포사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행궁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던 군사시설이다.
행궁후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사방을 관찰하기에 적절했다.
평상시에는 장교 1인 군졸 3인이 근무하였으나 왕이 행궁에 머물면 장교 2인
군졸 4인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전면 빈칸은 개방하고 좌우에 낮은 벽을처서 비바람을 막았으며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후면 1칸에는 온돌을 설치했다.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閑亭)
건물규모 및 구조 : 1칸 육각정, 육모 모임지붕 와가
미로한정(未老閒亭)은 화성행궁 후원에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한 후에 지었다.
미로한정이란 이름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
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한가하게 노년을 즐기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화성 축성을 막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미로한정에
올라가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천여 집이 들어서 번성한 모습을 바라보며
관리들을 칭찬했다.정조 재위 기간 동안에 활약한 화가 김홍도는 미로한정 주변에
가을 국화가 가득한 모습을 '한정품국(閒亭品菊)'이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행궁 후원에서 보는 행궁과 수원시 일부 모습.
화성행궁 후원의 단풍.
화성행궁 복내당은 수원부 고을수령과 그 가족들이 살던 곳이다.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라는
의미로정조가 직접 현판 글씨를 썼다. 유여택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 행차시에는 정조가 거처한 곳이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 씨가 머물 처소로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혜경궁 홍 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 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과
장복문 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장락당은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가 혜경궁 홍 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 편액을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 씨가 머물 처소로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혜경궁 홍 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과 장복문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장락당은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경룡관(景龍舘).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에 있는 부속건물로 1794년(정조 8년)에 건립되었으며 현경 왕후(혜경궁 홍 씨)가
거쳐하는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을 말한다. 경룡은 제왕을 상징하는
용을 의미하며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으로 가져와 정조가 직접 지었다고 전해진다.
건물 아래에는 네모난 돌기둥 4개를 세워 만든 지락문이라는 3칸 널문이 있다.
경룡관은 10.5칸의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락문위에 누 마루를 깔아 4면에는 평난간을 설치하고
그 위에 분합을 달아 배치하였다. 전판서 조종현이 썼다는 *경룡관*의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정조가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던
곳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집사청
집사청(執事廳).
화성행궁에 있는 집사들이 사무를 보던 건물로 1789년(정조 13년)에 세워졌으며 남쪽과
북쪽 방향으로 세워진 2채의 건물이 2002년 복원되어 있다.
집사청은 잡다한 사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왕명 전달 궁궐 열쇠관리 임금의 붓 벼루 먹 등의
비품을 조달하고 청원 관리 등을 맡은 조선시대 액정서(掖庭署)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기관이다.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에 행차할 때와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
모든 행사를 이곳에서 준비 하였으며 집사청 현판이 걸린 건물은 중앙에 대청 3칸과
양옆으로 1 칸씩 방을 두고 있다.
낙남헌
일제강점기 때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도 많은 전각들이 철거. 훼손되는 역사적인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낙남헌은 화성행궁이 철거 당시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이다.
낙남헌이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 18년(1794)에 완공되었다.
정조는 이곳에서 특별과거시험과 양로연 등 많은 행사를 치렀다.
비장청(裨將廳).
(사적 제478호)
수원시 팔달구 화성 행궁 내에 있는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대기하거나 사무를
보던 건물이다. 1789년 세웠다가 1796년 서리청 건물을 보수하여 그 자리로 이전하였다.
비장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업무가 대부분으로 비장청은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를 들어서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리청과 외정리소 사이에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세워진
남향 건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화성 유수는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는데 당시
비장청은 14.5칸 규모였다고 한다.
서리청.
서리청(書吏廳).
(사적 제478호)
서리청은 화성 유수부 관청의 여러 가지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인 서리들이
근무하던 건물이다.비장청 앞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정조 20년) 원래 서리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비장청에 내어주고 대신에 금도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증축하여
이전하였다. 1795년 을묘원 행시에는 수라간 으로도 사용하였다. 행궁 안 건물들은
10칸 내외로 지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서리청 건물은 당시 22칸으로 지어진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건물은 2002년 복원된 정면 5칸으로 지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는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었는데 화성행궁을
지키는 군대이다. 남군영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였고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봄, 가을로 두 번 시험을 치러 수석을 차지한 군사에게는
곧바로 관직을 높여 주는 등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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