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향이 사찰경내를 감싸안은 장경사 대웅전.
송암정에서 바라본 남장대와 개원사 조망.
좌익문(동문)
지수당앞의 코스모스
남한산 산행을 마치고 치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가에 옮겨 새워져 있는
삼전도비를 관람하기로 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1936년 12월 2일 청태종은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 했습니다.당시 도원수였던 만고의 역적 김자점은
평안도 의주산성과 백마산성을 지키던 임경업 장군을 피해 도성으로 향하던 청군을 제대로 막지
못해 10여일 만에 청군은 한양 근처까지 진군 했습니다.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피신 했던 인조는
결국 1637년 12월 30일 묘시(오전 5시~7시)에 항복합니다. 청군이 침략한지 59일째 되는
날이였습니다. 삼전도비는 이때 세웠습니다
삼전도비 옆면.
항복 의식은 참으로 치욕적인 방법으로 치뤄 졌습니다.
한강변에 세운 수항단에서 인조는 100미터쯤 되는
자갈밭을 기어가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박는 삼배구고두(三拜九鼓頭)의
례(禮)를 행 했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을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스무번도 더
머리를 땅에 박은 인조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였답니다. 처음에는 이것보다 더한 치욕을
주려고 했으나 사전 협상으로 그나마 많이 봐준것이라네요 청태종은 인조에게 조선에
자비를 베풀어준데 대하여 공덕비를 세우라고 명 했습니다. 인조는 항복 직후인 그해 3월
부터 비를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에 세우려던 비는 작다고 해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비신높이 395센치, 전체높이 570센치. 폭140센치의 비는 10월 30일에 완공 되여
11월 25일 청나라 마부대의 검사를 통과 했습니다. 이제 백비에 글을 쓰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누가 글을 지을건가. 누구도 치욕적인 글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새기기 까지는 2년이 또 걸렸죠. 1639년 12월 8일 비는 완공 됐습니다.
삼전도비 후면
인조는 당시의 문장가 이경석,장유,조희일등에게 글을 지을것을 명 했습니다.
그러나 작문은 다 형식적으로 써 청으로 부터 반려됐죠. 인조는 이경석을 따로 불러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고사를 말하며 부차의 와신과 구천의 상담처럼 조선의
후일을 위해 와신상담 하자. 지금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전도비의 글은 이경석이 지었습니다. 글씨는 오준의 것이며 각자는
여이징이 했습니다. 이경석은 이후 형인 이경직에게 글을 배운것을 한탄했고 오준은
손을 뭉겠다고 합니다.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후일 이일로 인해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로 부터 많은 공격을 당하고 수모를 받습니다. 죽어서도 노론의 반대로 84년
후에야 신도비를 세울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뭉게져 백년간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신도비는 지난 1975년에야 재건 됐습니다. 이일은 노론과 소론으로 파당이 생기는
결과도 낳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일 이였으니 이해해야 한다
쪽이 소론이 됐습니다.
삼전도비 전면
1997년 삼전도비에 붉은 스프레이로 370 이란 숫자와 철거라고 크게 써 놓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는 삼전도비가 훼손 됐다며 크게 보도 됐었습니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데
어찌 이런일이 하면서 법석을 떤 끝에 용의자 백모씨를 체포 했습니다. 당시 백모씨의 주장입니다.
줄였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고 있나) 국민 여러분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흘러버린 치욕의 역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에게 보복하고 있습니다. 청보다 더 미운것은
무능한 임금과 그 신하들 입니다. 370년 동안 조선 백성들은 그 비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으며 역사를 곱씹어 배울 사람은 백성들이 아니라 임금과 그 신하들 입니다.
그 비에서 역사를 배웠다면 273년후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환향녀의 피맺힌 울음
소리가 들리며 언땅에서 굶어죽은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개처럼 맨발로 끌려간 수많은
조상님들의 통곡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지금 무었을 하고 있습니까.그비는 한가롭게 공원에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대청황제공덕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해 청와대와 국회의사당.대법원,
국립중앙박물관 출입구에 세워 주십시요. 그렇게 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산산히 깨 부수어 철거
바랍니다. 후세들의 의기를 꺽을까 두렵습니다.그것이 아니라도 조국은 충분히 아픈 기념물들로
넘쳐 납니다. 대청황제공덕비를 삼전도비라 뜻없이 부르는것은 무었이 치욕스러워서 입니까.
삼전도비가 아니라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문화 해설사의 삼전도비 설명.
삼전도비는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패한후 1895년 고종이 한강에 수장 시켰으나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된 뒤일제에 의해 1913년에 다시 세워졌고 일제가 패망한 1945년에는 백성들이 나서서
땅속 깊이 묻어 역사 속으로 들어 갔었는데 1963년 홍수로 그 모습이 들어나자 위정자들은 무슨
큰 보물이라도 만난양 다시 이땅에 세워 비가 닳는다고 없던 지붕까지 만들어 씌우며 호들갑을 떱니다.
비에 써 있는대로 삼한 대대로 영원토록 이땅의 백성들이 청태종에게 칭송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내 조국이 자랑스럽습니다.
석촌호수
한창 공사중인 롯데월드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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